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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핸드스윙응용> group exhibition, Feb. 15, 2023 - Feb 28, 2023, D/P gallery, seoul

사생활의 영역이 딱 이 정도 크기였던 적이 있었다. 남기는 것을 참는 것 만큼 힘든 게 없었지만서도. 사치스런 도련을 잘라내고, 장황한 문장과 문장사이를 포게 접어 되도록 유쾌한 경험만 정리해둔다면 딱히 모자랄 것도 없었다. 그마저도 불시검문이 있을 때면 들추어 내야했지만 타인에겐 별볼일 없는 것들이었다. 주름진 옛 사진과 꾹꾹 눌러 쓴 편지는. 집으로 떠나기 위해 싸놓은 배낭은 섭섭할 만큼 가벼웠건만 보다 무거운 기억을 한가득 몸으로 외워 왔을까, 정리하기 두려워 풀어 헤치지 못한 이삿짐처럼 바뀐 집 구석 한켠을 장식했다. 잃어버리면 아쉽고 만, 스스로 사라지면 오히려 좋은. 혹은 으레 미련하게도 스스로 달아나지 않는다. 무해해보이나 한밤중의 치통으로 꿈을 깨운다. 마땅히 어찌할 도리가 없고 괜찮아진 다음 날에 응석부리기엔 민망하다. 점차 악몽의 주역은 가물어져 싱겁고 잔상은 선명해져 괴로웠다. 이제는 번거로움을 견딜 수 있을까. 조심스레 뜯어보기로 했다. 개어진 전투복 사이로 휴대용 바느질 키트가 어설피 있었고, 그 이유를 한땀한땀 생각해보았다.

 바느질은 이름과 휘장과 같은 라벨을 다는 방식으로 일이병 군인들을 벌하기 위한 부조리로 기능하였다. 비록 악습이지만 그 생김새가 반듯하여 나름의 미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 모양은 부조리를 바르게 잘 수행했는지의 엄격한 기준 -모양에 따라 다른 수직 수평과 뜸의 개수- 으로 작용한다. 실 가닥들은 이념의 상징인 라벨을 부단히 지탱한다. 라벨 표면에는 바늘이 같은 방향으로 출입하여 휘갑했기에 실의 지나간 흔적이 보이지 않지만, 라벨 안쪽에는 실의 이동으로 노동의 흔적을 드러낸다. 그 모양은 이미 추상화된 색과 형태를, 제한된 색과 선으로 다시 단순화되어 묘사된 것이다. <그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라벨을 반전하여 꿰매어 숨겨진 바느질의 모습이 보이는 라벨의 배면을 노출한다.

 

 악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병장이 될 때는 태극기, 바깥 풍경 등 자신의 취향에 맞게 자율적으로 계급장의 바느질 모양을 꾸미곤 한다. 부조리의 구조에서 나옴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금세 미화하거나 놀이로 만드는 것은 이상해 보이지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별이 모호한 현실이다. <흘러가는 물결 그늘 아래>는 가슴 폭에 역전된 상태로 자신만을 향한 지극히 사적인 그림을 모아 관리된 유물처럼 액자 속에 전시한다. 3^2cm 폭의 가슴 주머니를 캔버스 삼아 그려져 있는 군사분계선의 서해안 바다에는 부조리 밖을 희망한 지난 시간이 담겨져있다.

 

 전역을 기념할 때면 군장점에가서 부대원의 이름과 소속을 전투복에 오바로크(overlock)하는게 전통이였다. <15,336>은 수료하지도 않는 훈련의 휘장과 진중한 군 가사와 명언 등으로 지난 과거를 단 한 번의 미싱기로 화려하게 꾸미는 얄팍한 감성을 손바느질로 일일이 자수한 흔적이다. 외설적인 가사로 이루어진 비공식 군가의 감성적인 일부만 발췌하여 반복 강조하므로, 폭력에 노출된 젊은 남성이 안보의 책임으로 떠맡는 15,336시간의 복무기간을 애도한다. 더불어 서예 형식을 따르고 있는 글씨는 전시 때 암호로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부대내 문화로 자리한 해병대의 고유 글씨체인 ‘귀신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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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면에 자수, 가변설치, 400*400*200mm,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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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36> 면에 자수, 1150*480*30mm, 2023

<흘러가는 물결 그늘아래 Under the shadow of flowing waves> 면에 자수, 1520*450*30mm,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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